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케다 료타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1968년 [[후쿠오카현]]에서 태어나 후쿠오카현립 고쿠라 고등학교, [[와세다대학]] 문학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. 대학 졸업 후 [[가메이 시즈카]]의 비서로 근무하다가, [[1993년]]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큰아버지인 다나카 로쿠스케 전 관방장관(1923-1985)의 지역구였던 舊 후쿠오카 4구에서 자민당 공천을 받고 출마하지만 14,172표(3.2%)를 득표, 최하위로 낙선한다. 출마당시 만 25세였으며, 중의원 피선거권 연령인 만 25세를 넘긴지 3개월만에 갓 출마한것이다. 이후 소선거구제도가 도입되자 제41, 4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[[후쿠오카현 제11구|후쿠오카 11구]]에 자민당 후보로 출마하지만 계속 낙선한다. 그러다가 신진당, 무소속 후보로 자신을 꺾었던 야마모토 고조 의원이 자민당에 입당한 후 자신을 제치고 공천을 받자, [[2003년]] [[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]]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야마모토 의원을 꺾고 당선되면서 4번째 도전 끝에 국회에 입성했다. 첫 출마를 25살에 하는 등 정치 입문이 매우 일렀기 때문에 4수만에 당선된 건데도 35살에 중의원 의원이 되었다. 첫 당선 이후 [[자유민주당(일본)|자유민주당]]에 입당했으나 얼마 안 가 우정민영화 법안에 반대표를 던진 것 때문에 자민당 공천을 받지 못하고 [[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]]에 다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.[* 그가 비서를 지낸 [[가메이 시즈카]]가 대표적인 우정 민영화 반대파였다. 특히 규슈 지방 의원들이 우정민영화에 반대하였다가 공천을 못 받고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경우가 많았다.] 자민당 공천은 야마모토 고조에게 다시 돌아갔다. 선거는 초박빙 승부였고, 449표(0.22%) 차이로 야마모토를 꺾고 무소속으로 재선에 성공했다. 야마모토는 석패율제를 통한 비례대표로 당선되었다. 만약에 고작 수백표의 표심이 뒤바뀌어 [[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|제44회 총선]]에서 패했을 경우, 정치인생이 끝장나는 것은 거의 100% 확실했다. 자민당 야마모토 후보에게 패했을 경우 선거에서 1승 4패를 기록하게 되며, 앞으로 지역구의 경쟁상대인 야마모토를 제치고 자민당의 공천을 받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. 게다가 2005년 선거 이후에는 큰아버지인 다나카 로쿠스케 전 관방장관이 사망한지 벌써 20년을 넘기며, 자신이 비서로 모시던 가메이 시즈카도 더이상 자민당의 파벌영수가 아닌, 군소정당인 [[국민신당(일본)|국민신당]]의 일개 정치인으로 전락하게 된다. 이러한 정계은퇴의 갈림길속에서 무소속 후보로 0.2% 차이의 신승을 거두며 재선에 성공하는 바람에, 이후의 선거운과 정치운은 제대로 풀린다. 고이즈미 총리가 물러나고 [[2006년]] 9월 [[아베 신조]]가 총리가 되자 복당이 승낙되었으며, 방위대신 정무관을 역임했다. 게다가 자신의 선거구 맞상대였던 야마모토 의원은 인접 [[후쿠오카현 제10구|후쿠오카 10구]]로 지역구를 옮겨, 더이상 자신과 경쟁할 유력 정치인이 사라졌다. 이후부터는 계속 자민당 공천을 받아 지역구에서 당선, 현재까지 7선을 기록했다. [[아베 신조]] 2차 내각에서 방위부대신을 역임했으며, 아베 신조 4차 내각에서는 국가공안위원장,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등을 역임했다. 이후 [[다카이치 사나에]]의 뒤를 이어 [[스가 요시히데]] 내각에서 총무대신에 임명되었다. 2021년 12월 [[가와무라 다케오]]의 후임 일한의원연맹 간사장에 취임하였다.[[https://www.donga.com/news/amp/all/20211208/110687167/1|#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